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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유명세는 빈번한 경제위기와 더불어 일부 국가들의 기나긴 내전 탓이기도 하다. 196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50년 넘도록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콜롬비아에서 지난 5월 말 약 6개월의 평화회담 끝에 정부와 최대 반군조직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 발전방안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반군의 무장해제, 정치적 반대 행사 또는 정치 참여의 보장, 불법 마약거래 근절, 희생자들의 권리 구제, 평화협정 이행 등 협상 의제가 산적해 있긴 하지만. 내전은 1899~1902년의 ‘1000일 전쟁’, 1946~1958년 보수파와 자유주의 세력 간에 전개된 ‘대폭력’의 파생물로 볼 수 있으니 콜롬비아의 현대사 자체가 상호 적대와 불신의 고리로 연결된 셈이다. 난항이 예상되지만 금년 말까지 회담에 진전이 있다면,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과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선례처럼 좌익 게릴라 단체에서 합법적인 정치세력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1964년에 창설된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1990년대에 접어들어 정부군이나 우익 준군사 전투부대에 맞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마약거래, 불법 금 채굴, 요인 납치에 착수한 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악마적 속성을 지닌 게릴라 단체가 됐다. 약 1만6000명에 이르던 대원은 2001년 9월11일 이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에 의해 국제 테러조직으로 낙인찍히고 2002년 반군 진압을 공언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알바로 우리베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한 결과 요즘에는 8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런 위기 가운데 인구가 많지 않은 동남부 농촌 지역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작년 초 몸값을 노리는 납치활동의 중단을 선언한 데 이어 10월에는 10년 만에 정부와 대면 협상을 재개하면서 합법화의 기회를 찾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다수가 대화를 지지하지만 전임 대통령 우리베를 비롯한 지배층은 대체로 반군과의 회담 구상을 비판하고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이 납치·재산 강탈·살인 등 범죄행위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반군의 사면과 정치 참여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약 6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무려 500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이주민을 낳은 콜롬비아의 내전 속에는 정부군과 게릴라 반군의 오랜 교전은 물론 마약거래상과 우익 준군사 단체,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마약거래 범죄 조직 등의 발호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콜롬비아인들이 갈등의 고리를 끊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대폭력’의 와중에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콜롬비아의 비극은 휴전과 반목 상태를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거듭 실패하고 있는 한반도의 고통과 닮은꼴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배제 대상을 일컫는 표현이 ‘빨갱이’에서 ‘종북좌파’로 변했지만, 자극적인 딱지 붙이기를 통한 적개심 고취의 구습은 여전하다. 적대관계의 선봉에 섰던 남북의 군 지휘관들이 2004년 6월 장성급 군사회담을 가진 바 있고 2007년 10월에는 남북 정상회담도 열렸지만 그뒤 관계 개선의 가능성은 군사적 긴장과 상호불신 속에 점점 희박해졌다. 정권을 뛰어넘어 일관된 대북정책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평화 정착의 염원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맞이한 6월에 바라기는,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라는 차원을 넘어 이 땅에 또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고, 파스칼이 꿰뚫어본 대로 선과 정의를 추구하려는 전쟁에서 “천사가 되려 하다가 모두 짐승이 되었다”는 통렬한 반성이 이어졌으면 한다. 그것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남북의 수많은 영령들에 대한 진지한 보훈이 아닐까? 박구병 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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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이지윤
- 작성일20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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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이지윤
- 작성일20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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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신분석 철학자 자크 라깡(Jacques Lacan)은 "남녀가 하나가 되는 진정한 성관계 같은 것은 없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al)"라고 선언함으로써 사랑을 믿어온 많은 '순진한' 이들을 실망시켰다. 라깡에 따르면, 남녀의 욕망과 무의식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참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라깡의 진단은 옳은가? 김기덕은 (2004)에서 아내가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에 대한 사랑과 환상을 가짐으로써만 남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남편과 아내의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 남녀 간의 사랑은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욕망에 기반을 둔 '착각'임을 보여주었다. 이후에 나온 (2008)에서 김기덕은 여전히 사랑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결론은 사뭇 다르다. 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찬찬히 보자. 일본인 남자 진이 사랑하는 여자는 그를 떠났지만, 그는 그녀를 여전히 욕망하고 꿈 속에서 그녀를 찾아간다. 진이 꿈 속에서 옛 여자를 찾아가서 만나면 그것은 그의 꿈 내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전혀 일면식도 없는 한국여자 란이 자다가 일어나 진의 역할을 한다. 진이 꿈꾸는 내용을 란이 몽유의 상태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진이 꿈에서 옛 여자를 키스하면, 란은 몽유상태에서 그녀의 옛 남자, 즉, 그녀가 싫어서 스스로 떠났던 과거의 남자를 키스한다. 옛 여자에 대한 진의 욕망을 란이 몽유상태에서 행동으로 실현하지만, 그녀가 란 대신 찾아가는 것은 진의 옛 여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지만 지금은 헤어진, 그녀의 옛 남자이다. 옛 여자를 아직도 욕망하는 진이 그녀를 꿈속에서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진의 꿈 때문에 보기 싫은 옛 남자를 찾아가는 란은 고통스럽다. 진이 행복하면, 란은 불행한 것이다. 진과 란은 모두 사랑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들의 과거의 사랑의 대상에 대한 현재의 욕망은 서로 반대이다. 흑과 백처럼 이들은 서로 반대이지만 꿈꾸는 행위와 몽유상태의 행동으로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자 진과 여자 란은 흔한 남녀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말하듯 서로 이해와 조화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보완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꿈을 통해 남자 진이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을 만나고자 욕망하면 할수록, 여자 란은 잊고 싶은 과거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는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된다. 사랑에 대한 욕망을 매개로 이들은 관계를 갖게 되지만, 이들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갈등은 화해불가능하다. 옛 여자를 사랑하는 진의 욕망과 옛 남자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란의 욕망은 충돌한다. 이들은 서로 상대를 비난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란은 진에게 옛 애인의 사진을 버리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버리라고 요구하지만, 진은 옛 여자를 사랑하며 그녀에 대한 욕망을 중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란은 진의 욕망 때문에 자기가 혐오하는 옛 남자를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말하지만, 몽유상태에 들지 않기 위해 잠자는 것을 중단하지는 못한다. 진과 란이 갈등하는 장면에서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사람은 발(베일)로 반투명하게 가려지고, 다른 사람이 말하면 상대방이 역시 반투명하게 발로 가려진다. 상호이해를 통해 하나가 되는 성관계가 이들에게 불가능함을 영화는 암시한다. 이들은 해결책을 찾으려 고심한다. 동시에 잠을 자지 않는 상태, 즉, 한 사람이 자면 다른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한 사람은 꿈을 꾸고 다른 사람은 행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를 쓴다. 하지만 실패한다. 수마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패가 계속 되는 동안, 란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진은 옛 애인의 사진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버려진 사진 속의 진과 그의 옛 애인의 모습을 란이 보자, 카메라는 갈대밭에서 일어나는 환상의 장면으로 전환한다. 자동차를 몰고 진의 옛 여자와 란의 옛 남자는 갈대밭으로 들어간다. 둘은 연인사이이다. 이들은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섹스를 하다가 심하게 다투게 된다. 둘의 모습을 진과 란은 차 밖에서 보고 있다. 다투던 둘은 차 밖으로 뛰쳐나와 더 심하게 싸운다: 남자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거나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상대 남자만을 사랑하는데 왜 의심하는지 미친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이 둘이 서로 울부짖으며 다투는 동안,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진과 란이 이어받아 서로 다투고, 다시 진 대신에 (옛)남자가 란과 다투며, 이어, 란 대신에 (옛)여자가 (옛)남자와 다툰다. 갈대밭 장면에서 진과 (옛)남자는 하나처럼 역할하고, 란과 (옛)여자는 하나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형식은 진과 (옛)남자는 남성으로서 동일하고, 란과 (옛)여자는 여성으로서 동일하다는 것, 또는 난에게 진과 (옛)남자는 같은 남성으로 다가온다는 점, 진에게 란과 (옛)여자는 같은 여성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쨌든, 여기에 암시되는 것은 남성은 여성을 소유, 지배, 집착하고, 여성은 이러한 남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거부하고 못견뎌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은 자기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힌 채, 자기와 다른 상대의 타자성(alterity)의 존재를 보지 못한 채, 자기세계로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는 상대를 비난한다. 갈대밭의 환상 장면 후 란은 진을 찾아오고 둘은 보광사에 함께 간다. 이들은 부처상 앞에 함께 합장을 하고, 란이 목어와 종을 치면 진이 들어본다. 불교 벽화를 배경으로 둘은 함께 돌탑을 쌓는다. 쌓은데 성공하자, 진이 눈을 감고 합장을 한다. 그가 눈을 뜨니, 란이 사라져 보이지 않자, 그녀를 찾다가 돌담이 무너진다. 란을 이리저리 찾다가 진은 자동차 안에 들어가 기다린다. 자동차 안의 진이 있는 모습을 빛으로 환한 커다란 부처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진이 잠에 들어 졸고 있는 동안, 란은 부처상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어디 갔었느냐고 묻는 진의 질문에 란은 나비를 따라갔었다고 말한다. 진은 겨울인데 나비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절에 함께 왔지만, 란은 자기 영혼의 세계인 나비를 따라가고, 진은 여전히 란의 초월적인 나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절에서 둘은 화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진의 욕망과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란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다시 만난 이들은 자동차 안에서 키스를 하고 편안하게 잠이 든다. 하지만 진은 꿈속에서 옛 애인이 현재 사귀는 남자와 함께 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를 죽인다. 물론 이러한 진의 욕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것은 란이다. 이 살인 사건으로 진의 옛 여자는 정신병자가 되고, 란 또한 정신분열로 진의 옛 여자와 같은 정신병원으로 이송된다. 진은 자기의 욕망에 의해 란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욕망이 일어나는 잠에 다시는 들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자해를 감행한다. 쏟아지는 잠을 없애기 위해 끌로 자기 머리 가죽을 찢고, 망치로 자기 다리를 내리 친다. 진의 자기희생을 보며, 란은 연민의 눈물을 흘리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은 잠을 자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죽음으로 자기 생명을 끝내지 않는 한, 욕망을 끊을 수 없고, 욕망이 살아 있는 한, 란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멸하기 위하여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 동안 란은 병원에서 목을 매 자살하여 나비가 된다. 강에 떨어져 죽은 그의 얼굴에 나비가 날아와 앉고 진은 눈을 뜬다. 나비가 다시 날아서 진의 손에 앉는다. 이제 두 개의 손이 서로를 잡는다. 이 영화 후반부에서 진은 여자를 차지하려는 "바보스런" 남성적 욕망을 버린다. 그는 여성 타자와 합일 될 수 없으며, 여자와 하나로 합일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폭력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자기의 욕망을 여성의 몸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만족시키려는 바보짓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적 성관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결핍과 욕망의 끝없는 고통의 사슬을 자살로 끊어 버린다. 진이 자신의 욕망을 끊어 버릴 때 역설적으로 사랑이 온다. 그녀와 손을 함께 잡는 것이 이제 가능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이 란에 대한 책임으로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버릴 때, 란이 진에 대한 자신의 오해와 증오의 세계를 다 버릴 때, 둘의 영혼은 손잡을 수 있게 된다.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고 타자를 자기 속으로 들어오기를 요구(demand)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일성 방식에 의해 고통을 겪는 타자성의 존재를 알고 자기를 버릴 때, 주체는 타자와 손을 잡는 사랑의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암시한다. 정경훈 아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오마이뉴스 201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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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 작성자이지윤
- 작성일201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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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종종 이야기하는 것 중에 `낙인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명사 정보가 주는 신속한 판단의 장점과 편견의 발생이라는 단점을 모두 아우르는 현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 "○○는 사람을 죽였대"라는 말과 "○○는 살인자래"라는 말을 보자. 두 표현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자보다 후자에서 우리는 무언가 더 강한 느낌을 받는다. 왜일까? 사람을 죽였다는 묘사보다는 살인자라는 범주, 즉 명사 정보가 더 강한 심리적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반응도 다르다. 전자의 표현을 들으면 "○○가 왜 그랬을까?" 등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면, 후자를 들으면 "○○는 나쁜 인간이군!"이라는 식으로 단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범주로서의 명사 정보는 일종의 `심리적 도장찍기` 효과를 지닌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낙인 효과라는 말을 빌려 이야기한다. 그런데 낙인 효과는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 평가하는 전반에 걸친 오류와 함정을 잘 말해주는 기회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55세의 중년 남자로 서울 근교 신도시 거주자이고 대형 빌라 소유주이며 대기업 임원`이라고 사전에 정보를 들은 김갑동 씨를 지금 막 만났다. 이 사람은 그런데 `청바지를 입고 있고, 왁스를 바른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으며,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다소 당황해 할 것이다. 하지만 김갑동 씨에 대해 사전에 들은 정보가 `상상력이 풍부하며, 다양한 활동을 즐기며, 외향적 성격`이었다면 어떨까? 지금 내 앞에 있는 모습 때문에 놀라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무엇일가? 전자는 특정 인물의 명사화된 범주 정보를 나열한 것이고 후자는 그 인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는 그 범주 정보들로부터 쉽고 빠르게 전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을 터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묘사 자체에만 기초해 지금 있는 사람을 판단할 가능성이 더 크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우리 주변의 사회 현상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하철 ○○녀`라든가 `○○남`으로 어떤 사람을 불러놓고 그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격 혹은 행동 특징들까지도 우리는 `당연히 그렇겠지`라는 생각으로 빠르게 추론해 낸다. 물론 그렇게 추론해 낸 정보들이 그 사람과 맞아떨어질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명사화된 범주 정보로 어떤 사람을 쉽고 빠르게, 즉 쉽게 판단하고는 그 판단이 맞을 것이라는 착각을 자주 하곤 한다. 그 그릇된 판단의 중심이자 가장 큰 피해자는 나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보는 사람에 관한 서류에는 수많은 명사범주 정보가 존재한다. 출신지역, 출신학교, 형제관계, 예전의 직급 혹은 직함 등 말이다. 그런 범주들이 과연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굳이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하지 않고서라도 그 설명 양이 얼마 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성격이라든가 성향, 그리고 장단점을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그 사람을 여러 차례 다른 상황과 시점에 만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측면을 살펴봄으로써만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지닌 특징들을 파악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압박이 많을수록 CEO들은 명사화된 범주 정보들에 눈길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자신의 고정관념을 만족시키거나 바라던 결과로 이어지기보다는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를 만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쉽고 빠르게 내리는 결론이 대부분 틀린 이유다.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에 대한 판단인 이유는 빠르게 인출된 고정관념이 내 판단을 장악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맨 처음에 해야 할 일은 최대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내가 원하는 인재상과 맞아떨어지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매일경제 201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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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 작성자이지윤
- 작성일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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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과 의사가 시신 한 구를 부검하는 데에는 몇 시간이 걸릴 뿐이지만, 의과대학 학생이 시신 한 구를 해부하는 데에는 몇 달이 걸린다. 오늘 해부가 끝났다고 시신을 다 쓴 것이 아니다. 시신을 덮개로 덮었다가, 다음 실습 시간에 덮개를 열고 이어서 해부한다. 이것을 몇 달 동안 되풀이하는 까닭은 시신의 작은 구조도 꼼꼼하게 찾아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시신이 몇 달 동안 썩으면 안 되므로,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올 때 방부 처리를 한다. 방부 처리를 전문 용어로 ‘고정’(fixation)이라고 부른다. 살아 있을 때 모습으로 고정한다는 뜻이다. 시신에 주입하는 방부제를 고정액이라고 부른다. 고정액의 주된 성분은 포르말린이다. 포르말린은 살아 있는 사람한테 해롭기 때문에, 아주 묽게 만들어서 쓴다. 수백년 동안 이 고정액을 써 왔고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고정한 시신을 오래 만지는 해부학 선생(교수와 조교를 일컫는 말)부터 일찍 죽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어른끼리 만나면 서로 젊어 보인다고 말한다. 진짜 젊어 보여서 말할 때도 있고, 듣기 좋으라고 말할 때도 있다. 누가 나한테 젊어 보인다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늘 고정액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정액 덕분에 내 몸이 썩지 않으며, 따라서 젊음을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웃으면 마지막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해부학 선생은 죽은 다음에도 썩지 않아서 반드시 화장해야 됩니다.” 시신을 고정하는 방법은 학교마다 다른데, 내가 속한 학교에서는 다음 방법을 쓴다. 먼저 넓적다리 앞에 있는 넙다리동맥을 드러낸다. 넙다리동맥은 살아 있을 때 맥박을 만질 수 있으며, 이것은 피부에서 가깝다는 뜻이다. 따라서 많이 해부하지 않아도 넙다리동맥을 드러낼 수 있다. 드러낸 넙다리동맥에 주삿바늘을 꽂은 다음에 고정액을 주입한다. 동맥과 정맥은 온몸에 퍼져 있으며, 모두 심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넙다리동맥으로 주입한 고정액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이때 넙다리정맥을 열어서 동맥과 정맥에 있던 혈액을 뺀다. 그 결과로 혈액이 있던 자리를 고정액이 차지하게 된다. 고정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을 때에는 시신의 일부가 썩는다. 해부학 실습실의 시신은 모두 기증받은 것이며, 이 소중한 시신을 제대로 해부하지 못하면 참 안타깝다. 잘 고정된 줄 알고 학생한테 해부를 시켰는데, 나중에 일부가 썩은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학생은 시신을 바꿔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시신을 바꾸면 피부부터 다시 해부해야 되므로, 그 조의 학생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낸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바꾸자’는 의견도 내고, ‘대충 해부하고 다른 조 시신을 잘 살피자’는 의견도 나온다. 이처럼 고정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는 첫째 까닭은 시신의 혈관 상태가 나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동맥경화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게으르게 운동하면 동맥경화가 생긴다. 동맥경화가 심해지면 동맥이 막히고, 마침내 터져서 출혈을 일으킨다. 이처럼 혈관 상태가 나쁘면, 살아 있을 때 혈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아서 문제이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고정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아서 문제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기름진 음식을 조금 먹고 부지런히 운동해야 될 것이다. 둘째 까닭은 잘 고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를 비롯한 의료 기사가 있듯이, 의과대학에는 해부학 기사가 있다. 시신 고정을 맡은 해부학 기사는 관련된 기술을 갖추려고 언제나 애쓰며, 시신이 들어올 때마다 긴장하고 정성껏 고정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해부의 시작은 고정이며, 고정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과거 포르말린을 고정액으로 쓰기 전에는 알코올을 고정액으로 썼다.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 숙제로 벌레를 채집한 다음에 알코올을 주입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알코올 중에서 에틸알코올(술)을 즐겨 마시는 해부학 선생이 꽤 많다. 그들은 술집에 모이면 ‘건배’ 대신에 ‘고정’이라고 외친다. 해부의 시작은 ‘고정’이고, 해부학 선생인 자신부터 ‘고정’해야 된다는 논리이다. 살신성인의 정신일까? 아니다, 술 마시고 싶어서 지껄이는, 말도 안 되는 핑계다. 해부학 선생은 포르말린 때문이 아니라 에틸알코올 때문에 일찍 죽기 쉽다. 해부의 시작은 고정이며, 고정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한겨레 201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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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이지윤
- 작성일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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